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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특강 <이재 초상>, 작가 미상

2015-12-16 09:10 조회 676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미술사학자 오주석이 들려주는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 <한국의 미 특강>

<이재 초상>, 작가 미상, 비단에 채색, 97.9×5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드디어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대주제大主題에 도달했군요. 이 그림은 숙종 때의 대학자 이재라는 분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화면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어요. 그래서 교과서에서는 이재라고 하지만 저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재가 틀림없다는 어떤 증거도 화면상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초상화, 아까 제가 호랑이 그림이 전 세계 최고의 작품이라고 단언했듯이, 이 역시 인류 회화를 통틀어 최정상급 초상화입니다. 렘브란트가 최고의 초상 작가라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생각일 뿐, 실제로 그의 초상이 이 그림보다 낫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렘브란트는 4000억 원씩 하는데 우리나라 옛 그림은 최근 7억 원에 경매된 것이 가장 비싼 값입니다. 렘브란트 작품이 우리 옛 그림보다 예술성이 400배 나 더 높아서 그렇습니까? 문화재의 값이 라는 것은 어떻게 매겨질까요?


그 문화재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후손들이 얼마나 잘 사는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자기 문화를 사랑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망한 다음 일본 문화재가 미국과 유럽 등지로 헐값에 마구 팔려 나갔다가 6.70년대에 잘살게 되니까 다시 모조리 그것을 되사왔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양 미술품까지 대량으로 사들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은 한 점에 몇 억씩이나 하는 병풍 그림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엿장수가 수레 위에 지고 다니면서 팔았던 적도 있습니다. 예술 수준으로만 봤을 때 이 초상화는 분명 최정상의 예술품으로 렘브란트에 한 치도 밀리지 않습니다.


반듯이 앉은 주인공 인물에 아주 엄숙하고 단정한 기운이 배어 있는데, 보십시오! 형형한 눈빛의 얼굴을 중심으로 검정빛 복건이 이렇게 삼각형으로 정돈되어 위와 좌우 세 방향에서 얼굴이 돋보이도록 딱 받쳐 주죠.


단정하고도 편안한 인물의 기운이 화폭 전체에 흐르는데, 소매 끝에 두른 검정빛 선이 멀리서 메아리칩니다. 전체 구도는 삼각형으로 안정되어 있어서 차분한 선비의 차분한 선비의 기운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좀 더 가까이 들어가서 보면 이렇습니다.


(100-이재 초상 상반신 세부) 눈빛이 정말 형형하죠? 영혼이 비쳐 보이는 듯합니다! 제가 전시장에서 이 그림 실물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 지질 않습니다. 전시장을 아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걸작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작품 앞에 섰습니다.


벌써 세 시간 넘게 여러 그림을 돌아보느라고 몸이 퍽 고단해져서, 한 발에 체중을 싣고서 삐딱하게 선 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눈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두 발이 붙으면서 똑바로 서게 되더군요. 잠시 후에는 또 두 손이 아랫배 쪽에 단정하게 모아졌습니다. 그림의 엄숙 단정한 기운이 제 몸에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세부의 선을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옛 그림은 형태는 물론 각각의 선의 성질을 음미해야 참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복건이 꺾어진 선은 마치 생철을 접은 듯이 굳세고, 아래 드리운 천이 접혀서 생긴 선은 굵었다 가늘었다 하며 휙 하고 속도 있게 펼쳐진 기세가 참으로 활달하고 탄력이 넘칩니다.


또 옷 전체의 윤곽선과 주름의 선을 보십시오. 획 하나하나가 긴장돼서 고르게 흐르는데, 굵기의 변화가 없는 아주 점잖은 선으로 마치 철사인 양 굳세게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사실화이면서도 추상화인 셈입니다.


더욱 접근해 가까이서 보면, 노인 피부의 메마른 질감이 분명히 느껴지죠?(076-이재 초상 얼굴세부1) 그리고 이 수염의 묘사가 정말 놀랍습니다. 내려오면서 이리저리 꺾어지는가 하면 굵고 가는 낱낱의 수염이 비틀리면서 굵었다 가늘었다 합니다.


이런 표현, 지금 현대 화가들은 도저히 흉내도 못 냅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미대 석사 과정을 마친 한 화가가 이런 초상화를 옆에 놓고 옮겨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굴의 데생은 그럴 듯했지만 물기 없는 수염을 턱에서부터 끝까지 10여 센티를 끌고 가지를 못하더군요. 자구 끊어지니까요. 그래서 물을 좀 묻히면 이번에는 또, 꼭 비 맞은 수염 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더구나 이 수염들은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피부를 뚫고 나왔지요! 요즘 화가들, 정말 면도한 얼굴만 그리게 된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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